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1,540 2013.12.18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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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한다. 세상은 화려한 것을 갈망하고, 성공을 복이라고 하는데 성경은 왜 애통하는 자를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일까? 성공이 축복이라 하는 사람들은 애통은 저주이며, 능력이 없거나, 인생을 실패한 사람이 흘리는 눈물로 치부하기도 한다. 괴테는 ‘눈물의 빵을 먹어보지 않는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해보지 않고는 인생의 깊은 맛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의 깊은 맛은 화려함에 있지 않고 화려함 뒤에 감쳐진 눈물에 있다. 그리고 애통한다는 것은 자기 성찰을 통한 죄에 대한 통렬한 자각 없이 결코 애통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허세에 마음이 빼앗겨 영혼이 죽어 가는지도 모르고, 그 허세에 눌려 이웃이 고통을 당하는지도 모르는 채 살면서 만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는 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그래서 이 애통하는 자는 ‘가난한 자’와 그 맥을 같이 한다. 가난하니까 애통할 일이 많고, 하나님의 심정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눈물을 통해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알고,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도 읽어, 마음이 정화되고 맑아지며 천국을 향한 소망을 더 품게 된다. 그러므로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애통은, 단순히 서러워서 아파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밤낮없이 눈물로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호소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아 가슴을 치며 애통했다. 진리가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더 이상 그들의 소망이 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애통했다. 지금의 시대도 교회마다 온통 관심은 부흥과 성장뿐이어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는 관심이 없어 말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를 보면서 애통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은사주의 자들은 온갖 형태의 무당 같은 짓을 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애통해 하지 않는다. 주일학교, 중, 고등부, 청년회가 점점 무너져 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애통하는 성도 또한 극소수이다. 교회를 보며, 세상을 볼 때 암담하고 무너져 가는 소리를 들리는데, 지금이 정말 애통해 할 때이다. 

  그렇게 애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로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위로는 말의 잔치, 립 서비스가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감동이다. 우리의 모든 애통을 잠재울 수 있는 능력 있는 위로이다. 그래서 애통하는 자는 복가 있다는 것은 그 하늘의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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